시사칼럼

구속과 자유

daecho 2005. 4. 4. 22:00
무기형을 받은 장기수가 모범수로 감형되어 출감하는 순간 최고의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늘 구속받고 살던 그는 아무런 구속이 없어진 무한한 자유가 오히려 더 큰 구속과 같이 답답하기만 하다. 결국 구속을 벗어나 자유로운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목을 매 자살한다. 그에게 감옥이 자유이고, 사회가 구속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영화 ‘쇼생크 탈출’의 한 장면이다. 

장기수에게 구속은 오히려 자유였고, 자유야말로 구속이었을 뿐이다. 인간은 길들여지기 나름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너무 오랫동안 구속을 받으면 자유가 오히려 더 큰 구속이 되어 버린다. 차라리 구속에서 사는 것이 오히려 자유로웠던 것이다.

지금의 우리사회도 마찬가지이다. 국가보안법으로 인하여 최소한의 사상, 양심의 자유마저 구속당하고 있다. 또한 사립학교의 주인들은 교직원과 학생들을 구속하고, 언론은 민의 알권리를 구속하고 있다. 일제 때 친일분자들은 민을 구속했고 해방 후 지금까지 지도층으로 존재하면서 끊임없이 구속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국회에서 이러한 구속이 오히려 자유롭고, 자유야말로 구속이라며 선전한다.

그들은 민을 구속시킴으로서 스스로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타인을 구속한다면 그것도 진정한 자유라고 하기가 곤란하다. 타인에 대한 구속을 통하여 자신의 자유를 지킨다는 것은 스스로를 구속하는 것과 다름 없다. 그들이 민을 구속하면서 얻은 권력과 돈은 안락함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은 여전히 그들의 목을 죄고 있을 뿐이다.

결국 그들은 민의 목을 죄면서도 자신의 목을 죄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들은 절반의 민이 국보법을 찬성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민이 국보법의 실상을 안다면 끝까지 찬성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찬성한다고 해도 그들은 이로 인하여 자신에게 떨어질 떡고물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한 민은 오랫동안 구속을 받아왔고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겨왔기 때문에 그것을 폐지한다는 것은 두려움이 앞선다. 변화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동안 민은 무기수였다. 그들은 그동안 법으로 구속받았던 지난 세월이 앞으로 새로운 변화 보다도 더 편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찬성한다. 그것은 무기수에게 자유를 주었을 때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를 부채질 하는 것은 개혁대상의 언론, 사립학교들이었다. 

4대 개혁법은 무기수인 민에게 자유를 주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민을 볼모로 반대하고 있다. 그동안 민을 구속해왔는데 이제 와서 자유를 준다는 것은 오히려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우 때문에 반대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민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은 민은 끊임없이 구속해야 탈이 없다는 생각일 뿐이다. 민에게 자유를 주는 날 그들은 이 땅에 설 곳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열우당은 민에게 통과시키겠다며 큰소리를 치고 있지만 진정으로 그러한지 의문이다. 색깔론에 지쳐 아무런 색깔도 내지 못한 채 흉내만 내고 현상유지하는 데 급급한 것으로 비쳐진다. 여야가 아무런 색깔도 없이 백지라면 그것은 백치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다.

이제 민은 진정한 자유를 찾아 구속을 벗을 때가 왔다. 따라서 민이 구성한 국회가 백치상태로 가고 있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