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1. 꽃 : 이름과 실체의 관계
김춘수의 대표작 『꽃의 소묘』는 언어의 철학성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언어의 유희에 빠졌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당시 모더니즘과 민중문학이 본격화 되었는데 그의 시는 주로 모더니즘 미학에 근거한 시였다. 이 때문에 대중들에게 어렵고, 관념적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하였다. 그는 언어의 의미에 관심을 가졌고 언어란 기호일 뿐이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꽃의 소묘를 통하여 보여주었다. “시는 언어의 예술, 그 이상의 무엇도 담을 수 없다”는 확고한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김춘수의 시는 꽃에 관한 언어에 대하여 상식을 벗어나 그 실체를 부정하는 ‘꽃’이라는 시이다. 우리들은 일상적으로 꽃을 보고 그것을 별다른 생각 없이 꽃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꽃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 꽃이 된 것이다. 이름을 붙이기 전에 그것은 하나의 사물에 불과하다. 그래서 김춘수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던 것이다. 또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즉 꽃이라고 이름을 붙였을 때 그것은 보편적인 사물에서 벗어나 개별적인 꽃이 된 것이라고 시인은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꽃이라는 이름을 정확하게 붙였는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름을 잘못 붙였다면 사실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호박꽃도 꽃이냐?’라는 말을 흔히 한다. 이 말은 호박꽃을 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꽃은 아름다움을 의미하고 있으며 호박꽃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말을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춘수 시인은 호박꽃을 꽃이라고 불렀다면 그것은 꽃이 되어 시인에게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빛깔과 향기가 나는 것을 꽃이라고 했으며 그것도 아름다운 것이었을 때 꽃이라고 부르고 있다. 따라서 호박꽃은 그러한 것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꽃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호박꽃을 꽃이라고 부르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점을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공자는 이름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는 정명(正名)론을 주장한다. “명(名)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질 수 없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禮樂)이 흥하지 못하며, 예악이 흥하지 못하면 형벌이 공평하지 못하고, 형벌이 공평하지 못하면 백성들이 손발을 편히 둘 곳이 없다.”(논어) 그는 명을 바로 해야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다고 했다. 이 시는 정명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로서 서로 인정해 주길 원하는 것이 주로 나타나고 있다.
맹자는 명과 실을 바로 하지 않으면 혼란해진다면 고자를 비판한다. 흰깃털, 흰눈, 흰옥은 모두 흰색이다. 고자는 모두 같은 흰색이라고 하지만 맹자는 다르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개와 사람의 본성을 고자는 같다고 하지만 맹자는 다르다고 한다. 고자는 사람의 본성을 본능적인 욕구로 본 반면에 맹자는 인의라고 생각한 점이 다르다. 따라서 고자는 동물과 사람의 본능은 같을 수밖에 없다고 했고, 맹자는 동물은 본능만 있지 인의(仁義)가 없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과 다르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을 백우(白羽), 백설(白雪), 백옥(白玉)에 비유했다. 고자는 그것들은 모두 같은 백색이라고 했지만 맹자는 서로 다른 백색이라고 했던 것이다. 고자는 현상을 보고 같은 백색이라 했고 맹자는 본체를 보고 다른 백색이라고 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자는 인간이 먹고, 자고, 남녀 간의 성행위를 즐기는 것은 동물과 같다고 했기 때문에 본성이 같다고 했지만 맹자는 그것이 현상일 뿐 인간의 본체는 인의이고 그것이 동물과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처럼 인간과 동물이라는 명칭과 그 실체에 대한 인식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논쟁이 일어났다.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 김시인은 꽃이란 다 같은 말이지만 아름답고 향기가 나는 것을 꽃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모든 꽃을 같은 꽃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 맹자와 유사점이 있다.
하지만 순자는 이름이란 실체가 없으며 다만 사람들끼리 약속한 것이라고 한다. “명은 본래 실이 없으며 약속으로써 실을 가리킨다.”(순자 정명편) 명이 없다면 혼란해지기 때문에 명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 시인이 꽃이라고 부르는 것은 약속에 불과한 것이며 꽃이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노자는 명칭을 부정한다. “도라고 부르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고, 이름을 붙이면 이미 이름이 아니다.”(노자 1장), 이름이 없는 것이 천지의 시작이라고 한다.(노자 1장) 즉 천지는 처음에 이름이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지만물의 뿌리인 도를 노자는 말한다. 그러나 그 도는 이름이 아니고 다만 억지로 이름을 붙여서 도라고 했다는 것이다. “내가 그 이름을 알 수는 없지만 억지로 글자로서 도라고 하였다.”(노자 25장)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사회가 혼란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 시인이 꽃이라고 불렀을 때 그것은 이미 꽃이 아니다. 하지만 시인은 꽃이라고 불렀을 때 시인에게 꽃으로 다가온다고 했다. 하지만 노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것을 꽃이라고 부를 때부터 이미 언어의 혼란을 가져오고 그로 인하여 사회의 혼란을 가져온다고 본다.
만약 김춘수가 자신이 꽃이라고 부르는 것만을 말했다면 주관에 빠질 위험이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자신을 그렇게 불러주기를 말하고 있으므로 상호교류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다소 지나친 주관을 피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친 주관에서 오나전히 탈피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만의 꽃이 다른 사람에게 꽃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이 때문에 보다 더 객관성을 지닐 필요가 있다. 완전한 주관이라면 완전한 객관과 일치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모색했을 때 진실한 꽃이 될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이다.
2. 꽃과 아름다움 : 앎과 행위의 일치
꽃은 아름다운 것이다. 김춘수가 꽃을 보고 꽃이라고 불러 주었을 때 꽃이 되었다고 한 것은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내 마음 속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라고 시인이 말한 것처럼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이고, 자신도 아름다운 꽃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한다.
꽃이란 아름다운 것이고 그것을 보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아름다운 꽃을 보고 좋아한다. 명나라 때 양명학의 집대성자인 왕수인은 미인을 보는 것은 지(知)이고 좋아하는 것은 행(行)이라서 지와 행은 따로 분리할 수 없다고 한다. 미인을 본 순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동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미인을 보고나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대학에서 가리키는 지와 행은 미인을 좋아하고 악취를 싫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미인을 보는 것은 지에 속하고 미인을 좋아하는 것은 행에 속한다. 다만 미인을 보았을 때 이미 스스로 좋아하는 것이지 보고 난 후에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것은아니다.”(전습록) 이 때문에 주희의 선지후행(先知後行)을 비판하고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하였다. 만약 알지만 행하지 않는 것은 사욕으로 인하여 단절 된 것이기 때문에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知)는 행(行)의 주의(主意)이고, 행(行)은 지(知)의 공부(工夫)이고, “지(知)는 행(行)의 시작(始作)이고, 행(行)은 지(知)의 완성(完成)이다.”(전습록)
인간은 꽃을 꽃이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시인은 아름답기 때문에 꽃이라고 부르고 그것이 존재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 선천적으로 인간의 마음 속에 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한 생각을 시인은 시 속에서 나타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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