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밤이여 나뉘어라' : 어둠없는 밝음 속 천재의 파멸

daecho 2006. 11. 7. 13:06
 

해가 있으면 달이 있고 해와 달빛이 있는 날과 구름에 가려 없는 날이 있다. 이러한 순환 속에서 곡식은 열매를 맺는다. 만약 항상 밝기만 하면 곡식은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 빛과 그림자의 조화가 잘 되었을 때 결실을 맺는다. 즉 음과 양이 순환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인간도 이러한 자연의 원리에 순응했을 때 자신을 보존할 수 있다. 순응하지 못했을 때 보존을 하지 못한 채 파멸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정미경의 ‘밤이여 나뉘어라’(2006년 이상문학상 수상)는 늘 낮같이 환한 세계에서 최고의 주목을 받았던 천재의사의 파멸을 그린 소설이다. 소설의 내용을 이끌어가는 ‘나’는 전에 의학도였지만 천재인 친구에게 눌려 직업영화감독으로 전환하였다. 친구에게 실력은 물론 사랑하는 여자도 빼앗겼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혀 살고 있었다. 이 소설은 천재의사인 친구의 파멸을 그림으로써 다소 진부함을 준다. 다만 노르웨이의 백야라는 자연현상과 대치시키면서 천재의 파멸을 그리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의대, 의사는 우리시대에 수재들이 모인 집단이며 그 대명사와 같은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기에 현실에서 최고의 자부심을 가질만하다. 더욱이 경제적인 풍요와 사회적인 우대를 가져다주기 때문에 그 어떤 직업인 보다 우월의식을 갖는다. 더욱이 그 집단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소설 속의 ‘나’의 친구가 그러하다. 반면에 의사의 길을 접고 영화감독의 길을 가고 있는 ‘나’는 현실도피적인 성향을 풍긴다. 영화라는 것 자체가 현실이 아닌 영상이라는 대상물이다. 연극이라면 관객과 직접 맞닿아 있지만 영화는 영상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닿게 되는 한계가 있다.


그러한 점에서 작가는 ‘나’라는 1인칭 주인공을 영화감독으로 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노르웨이의 영화제에서 초대받을 정도로 성공한 감독이었고, 반면에 친구인 의사는 국내 의대 중에서도 최고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하여 그 누구와 견줄 수 없는 실력을 가졌지만 교수들로부터 괘씸죄를 얻어 졸업도 못한다. 결국 미국으로 유학을 가 의사로서 인정을 받았지만 병원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 알콜중독자가 된다. 그 후 노르웨이의 연구소에서 최고실력의 연구원으로서 생활하지만 그것도 적응하지 못한 채 자신의 집에 연구소를 차린다.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연구를 하겠다면서 모든 재산을 다 털어 넣었지만 이루지 못한 채 돈은 바닥나고 거의 실업상태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 역시 비현실적인 연구로 남아 있는 열정마저 소진되고 만다. 알콜중독은 더욱더 심해지면서. 이를 두고 보았을 때 둘 다 현실도피성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영화감독은 현실에서 성공으로 가고 있는 반면에 그의 친구는 파멸로 가고 있는 중이다. 


영화감독은 의대생활 속에서 친구로 인하여 어둠을 맛보았지만 그 친구는 어둠을 맛보지 못한 채 브레이크 없는 열차처럼 생활하고 있었다. 마치 열차가 전복되기 전까지 무한질주 하면서도 언제 부서질지 모르듯이. 밤이 없는 낮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운자크레보의 백야는 친구를 대변해 준다. 더욱이 그곳에서 둘은 만난다. 그리고 뭉크의 그림을 본다. 뭉크 역시 비운의 생을 살았던 화가였고 그의 아버지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의사였다. 그의 대표작은 ‘백야’이다.


밤이면서도 낮과 같이 환한 운자크레보의 백야, 그것을 그린 뭉크전시관의 백야, 환한 대낮처럼 실패를 모르고 주목받으면서 살다가 저물어가는 천재적인 의사, 의사인 친구로 인하여 밤처럼 살다가 이제 낮으로 향해가는 영화감독의 대칭구조로 이 소설은 되어있다.


결국 친구를 찾아간 ‘나’는 실망만 한 채 차라리 만나지 않은 것이 나을 뻔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숙소인 호텔로 돌아온다. 그 때 밖에서 ‘나’를 찾는 알콜중독자인 친구의 거친 절규가 들려오고 직원으로부터 손님이 찾는다는 연락이 온다. 하지만 ‘나’는 그를 모른다고 답한다. 마치 베드로가 새벽닭이 울기 전에 예수를 모른다고 대답한 것과 같이.


이 소설은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것이다. 어차피 성공하지 못할 의사의 길이라면 다른 길을 찾아서 떠나는 ‘나’, 그리고 천재라는 소리를 듣지만 현실에서 적응하지 못한 채 이루지 못할 연구를 하는 친구를 대비하여 그린 소설이다. 거기에 운자크레보와 뭉크전시관의 백야를 대비시켜 절묘하게 묘사하였다.


운자크레보의 백야는 자연현상이다. 그곳에 맞게 사는 사람은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다. 그 의사가 천재이기 때문에 백야와 같다고 묘사한다. 이 때문에 ‘밤이여 나뉘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다. 그는 운자크레보의 백야에 적응하지 못해서 쓰러져 가는 것이 아니라 연구소에서 적응하지 못하여 그러하다. 따라서 ‘밤이여 나뉘어라’는 ‘천재여 그곳에 적응하라’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친구는 물론 아내마저도 그를 버릴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새벽닭의 “꼬끼요!” 소리처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짐작했을 때 교훈적인 내용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교훈이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이다. 따라서 운자크레보와 뭉크의 백야와 같이 의사와 나도 자연적으로 설정하여 묘사하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