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다 잘 살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다. 잘 살고 싶다는 게 우선적으로 잘먹고 잘입는 경제적인 풍요를 말한다. 그 다음에 즐기는 것, 즉 성적인 쾌락일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경제적인 풍요를 원하기 때문에 산업혁명도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로인해 자본주의가 발생하였고 이러한 자본주의는 경제적인 풍요를 가져오긴 했지만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일어나면서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어디까지나 부르주아(신흥상공업자)들의 자유로운 상공업활동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였던 것이다. 이러한 빈부의 격차로 인하여 비참하게 살고 있는 빈자를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나타난 것이 바로 사회주의이다.(사회주의는 정치적인 개념이고 경제적인 개념은 공산주의이다.) 사회주의는 평등의 실천으로서 경제적으로는 공동생산, 공동분배를 실현하는 것이고 정치적으로는 모든 정치 내지는 정책결정에 프롤레타리아가 참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실현으로서 구소련이 등장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프롤레타리아가 참여하는 정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든 프롤레타리아가 정치에 참여했던 것은 아마도 고대 그리이스의 폴리스만이 유일했을 것이다. 물론 여자와 노예는 참여치 못했다.
이러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대립되는 길을 갈 수밖에 없었으나 자본주의 내에서도 빈부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서민의 복지증진을 위해 사회주의의 평등을 수용하게 되면서 나타난 것이 사회민주주의이다. 사회민주주의는 20의 부자에게 세금을 거두어 80의 빈자에게 복지를 늘려주는 방식이었으나 현실적으로는 서민복지예산 때문에 정부의 재정적자를 초래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정부의 재정적자는 다시 모든 시민들의 부담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나타난 것이 신자유주의이다. 신자유주의는 정부의 시장간섭은 최소화하면서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키 위해 부자들의 세금을 감면하는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에 빈부의 격차는 어쩔 수 없었다. 결국 20의 부자를 위해 80의 빈자들이 희생당하는 꼴이 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재정적자는 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는 현대의 정책에 대별되는 것들이다. 유럽에서의 영국과 독일은 현재 사회민주주의 정권이다. 예전의 영국의 대처나 독일의 콜정권은 신자유주의였고 미국의 레이건 정권 역시 신자유주의의 대표라고 알려져 있다. 현재 유럽에서는 북구라파의 경우 대표적인 사회민주주의이다. 구미에서는 이러한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지속적으로 시험대에 오르고 있는 반면에 아시아국가들은 일본, 싱가포르, 대만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나라들이 경제적으로 난국을 맞고 있은 지 오래이다. 한마디로 조타수가 없는 배가 정처없이 떠다니는 꼴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교자본주의는 아시아의 5룡중 선두를 달리고 있는 싱가포르의 이광요 수상에 의해서 아시아적 가치로서 나왔던 것이다. 그는 유교자본주의를 권위에 의한 통치자의 계획경제, 혈연공동체 중심 등을 유교자본주의로 이야기했다. 또한 한국의 박정희정권도 유교자본주의로 해석하는 경우도 많다. 대통령의 권위로서 정부가 주도하는 기획경제를 통하여 한국경제가 도약했다는 것이다. 그 역할을 했던 곳이 바로 지금은 사라지고 만 경제기획원이었다.
여기서 과연 유교자본주의를 권위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인가가 문제이다. 유교는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일반적으로 공자의 사상을 말하고 공자사상의 핵심은 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공자는 여러제자들에게 인을 각기 다른 것으로 말했다. 수제자였던 안연에게는 자신을 극복하고 예절로 돌아가라는 극기복례라고 말했고 자하에게는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인 효제라고 말하면서도 증자에게는 자신에서 정성을 다하고 남을 용서하는 충서로 말했다. 또다른 제자들에게는 내가 싫어하는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는 뜻으로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인에 대한 말은 여러가지로 나와 있기 때문에 한가지로 정의하기란 어렵다. 단지 인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윤리라는 정도로 감을 잡을 수가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나를 위하고 남을 위한다는 정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자의 인을 권위로 해석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권위에 의한 계획경제는 더욱이 유교자본주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특히 과거의 박정희 정권을 유교자본주의라고 정의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이며 그의 계획경제는 정경유착의 원조가 되었다. 물론 그의 계획경제가 완전히 실패 한 것은 아니다. 성공한 케이스로 포철을 들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교자본주의의 진면목은 무엇인가? 라고 할 때 이것은 마치 캘빈이 기독교윤리를 가지고 자본주의 윤리를 말한 것과 같은 자본주의윤리로서 역할 을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불황을 겪고 있다. 이러한 경제불황은 근본적으로 정부의 경제정책때문이다. 현상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의 경제불황은 일본과 미국경제의 불황이 원인이고 이것은 우리정부가 아무런 대책없이 금융시장을 개방하고 자유화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조화 현상을 일으켜 불황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경제정책을 내는데 그 기반으로서 사상을 갖고 있지 않고 그저 선진국을 따라가거나 그들의 요구로 나왔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러한 정책을 제고하여 유교자본주의에 대해 연구하고 정책을 시도해 보는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대립되는 길을 갈 수밖에 없었으나 자본주의 내에서도 빈부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서민의 복지증진을 위해 사회주의의 평등을 수용하게 되면서 나타난 것이 사회민주주의이다. 사회민주주의는 20의 부자에게 세금을 거두어 80의 빈자에게 복지를 늘려주는 방식이었으나 현실적으로는 서민복지예산 때문에 정부의 재정적자를 초래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정부의 재정적자는 다시 모든 시민들의 부담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나타난 것이 신자유주의이다. 신자유주의는 정부의 시장간섭은 최소화하면서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키 위해 부자들의 세금을 감면하는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에 빈부의 격차는 어쩔 수 없었다. 결국 20의 부자를 위해 80의 빈자들이 희생당하는 꼴이 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재정적자는 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는 현대의 정책에 대별되는 것들이다. 유럽에서의 영국과 독일은 현재 사회민주주의 정권이다. 예전의 영국의 대처나 독일의 콜정권은 신자유주의였고 미국의 레이건 정권 역시 신자유주의의 대표라고 알려져 있다. 현재 유럽에서는 북구라파의 경우 대표적인 사회민주주의이다. 구미에서는 이러한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지속적으로 시험대에 오르고 있는 반면에 아시아국가들은 일본, 싱가포르, 대만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나라들이 경제적으로 난국을 맞고 있은 지 오래이다. 한마디로 조타수가 없는 배가 정처없이 떠다니는 꼴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교자본주의는 아시아의 5룡중 선두를 달리고 있는 싱가포르의 이광요 수상에 의해서 아시아적 가치로서 나왔던 것이다. 그는 유교자본주의를 권위에 의한 통치자의 계획경제, 혈연공동체 중심 등을 유교자본주의로 이야기했다. 또한 한국의 박정희정권도 유교자본주의로 해석하는 경우도 많다. 대통령의 권위로서 정부가 주도하는 기획경제를 통하여 한국경제가 도약했다는 것이다. 그 역할을 했던 곳이 바로 지금은 사라지고 만 경제기획원이었다.
여기서 과연 유교자본주의를 권위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인가가 문제이다. 유교는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일반적으로 공자의 사상을 말하고 공자사상의 핵심은 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공자는 여러제자들에게 인을 각기 다른 것으로 말했다. 수제자였던 안연에게는 자신을 극복하고 예절로 돌아가라는 극기복례라고 말했고 자하에게는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인 효제라고 말하면서도 증자에게는 자신에서 정성을 다하고 남을 용서하는 충서로 말했다. 또다른 제자들에게는 내가 싫어하는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는 뜻으로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인에 대한 말은 여러가지로 나와 있기 때문에 한가지로 정의하기란 어렵다. 단지 인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윤리라는 정도로 감을 잡을 수가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나를 위하고 남을 위한다는 정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자의 인을 권위로 해석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권위에 의한 계획경제는 더욱이 유교자본주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특히 과거의 박정희 정권을 유교자본주의라고 정의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이며 그의 계획경제는 정경유착의 원조가 되었다. 물론 그의 계획경제가 완전히 실패 한 것은 아니다. 성공한 케이스로 포철을 들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교자본주의의 진면목은 무엇인가? 라고 할 때 이것은 마치 캘빈이 기독교윤리를 가지고 자본주의 윤리를 말한 것과 같은 자본주의윤리로서 역할 을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불황을 겪고 있다. 이러한 경제불황은 근본적으로 정부의 경제정책때문이다. 현상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의 경제불황은 일본과 미국경제의 불황이 원인이고 이것은 우리정부가 아무런 대책없이 금융시장을 개방하고 자유화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조화 현상을 일으켜 불황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경제정책을 내는데 그 기반으로서 사상을 갖고 있지 않고 그저 선진국을 따라가거나 그들의 요구로 나왔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러한 정책을 제고하여 유교자본주의에 대해 연구하고 정책을 시도해 보는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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