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칼럼

한-칠FTA, 이미 엎어진 농업

daecho 2004. 2. 17. 13:53

4년여의 기나긴 여정 끝에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우리에게 자유무역협정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많은 농민들의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칠레가 농업강국은 아니지만 우리보다 월등하게 우위인 것은 분명하다. 특히 과수농업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하다.


얼마전 마트에서 칠레산 포도를 샀다. 물론 호기심으로 산 것이다. 그러나 국산 포도에 비해서 당도가 상당히 높아 매우 놀랐다. 특히 포도즙을 냈을 때 더욱더 빛을 발했다. 앞으로 칠레산 포도는 싼 가격으로 마트에 진열될 것이다. 국산 포도 보다 싼가격에 당도가 높은 칠레산 포도는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다.


시장에서 애국심을 기대한다는 것은 사실상 무리이다. 그 기대는 강요에 가깝기 때문이다. 결국 국산포도는 서서히 밀려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과수농가의 피해는 불가피하다.


앞으로 정부에서 농업대책을 세우겠다고 한다. 하지만 선후(先後)가 바뀌었다. 현재 농민들은 가계부채로 시달리고 있고 이미 국내농업은 피폐해진 상태이다. 부실기업에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을 쏟아 부으면서도 농업지원금은 새발의 피도 안된다.


물론 부실기업이 쓰러진다면 정치자금을 받을 수 있는 기업이 사라지기 때문에 자신들의 정치생명을 걸고 공적자금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자금을 투입할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농민들이 정치자금을 그들에게 줄 수 없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이기적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국내농업이 어느 정도 안정된 상태에서 한-칠레 FTA를 비준했어야 한다. 비준 후에 농업을 지원한다 해도 회복하기는 어렵다. 이미 선후를 잃어버렸다.


『대학(大學)』에 “사물에는 본말(本末)이 있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니 선후(先後)를 알면 도(道)에 가깝다.”라는 문구가 있다.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일을 정확하게 구분하여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부와 국회는 이러한 말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공산품 수출을 위하여 농업수입은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지난날 전체주의적인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전체를 위하여 소(少)가 희생될 수 없다. 그러한 생각은 민주주의 시대에 전체주의로 환원시키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농민들에게 아무것도 받을 것이 없다고 해서 마냥 무시한다면 국가위기로 되갚음 당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앞으로 어떤 정책이 나오더라도 국내농업의 회복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농산물도 외국에 의존해야 한다. 하지만 지나친 의존은 국가기반이 흔들린다. 자칫 잘못하면 식량난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지난날 오일쇼크로 경제위기를 겪었고, 금융쇼크로 외환위기를 겪었으나, 앞으로 농업쇼크로 식량위기를 겪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는 그러한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우연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