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

사회주의적인 리얼리즘, 캔 로치

daecho 2006. 11. 12. 15:55
 


영국인에게 기독교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헨리8세가 왕비와 이혼하기 위하여 카톨릭을 버리고 성공회를 세운 것이 그 시초이다. 민중의 개혁요망에 따라 루터, 캘빈 등이 개혁을 단행하여 세운 개신교와 달리 왕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세운 성공회는 카톨릭과 가장 많이 닮은 개신교이다. 하지만 영국은 성공회의 전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최초로 산업혁명을 이룬 나라이며 전세계의 1/4을 영토로 만든 대제국이었다. 산업혁명은 영국에게 대제국과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었지만 빈부의 격차라는 재앙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이 때문에 빈부의 격차를 없애고 평등을 실현한다는 사회주의 발상의 진원지가 되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인 오웬이 영국에서 나왔고, 마르크스가 영국에서 생활하며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론을 구상했다.


이러한 배경이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적인 성향의 캔 로치 감독이 영국에서 등장한다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는 종교적인 성향을 철저히 배격한다. 그의 영화 ‘레이닝 스톤’에서 밥은 실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실망하지 않고 열심히 교회에 다니면서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더욱이 하나 밖에 없는 딸이 성찬식 때 입을 드레스를 마련하기 위하여.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상태에서 헌 드레스도 아니고 새 드레스를 사주기 위하여 돈을 벌려고 하는 오직 한가지 이유는 신을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일자리를 주려하지 않는다. 심지어 교회에서 하수구를 청소하다가 정화조를 건드려 똥을 뒤집어써도 신부는 그에게 돈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부자들의 살아 있는 역할을 하는 보수당은 그에게 드레스 살 돈을 주는가? 그것도 아니다. 밥은 보수당의 잔디를 몰래 뜯어다가 판다. 그것은 부자 중심의 정책을 펴는 보수당이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캔감독이 보여주는 것이다.


밥은 오직 신을 믿고 성실하게 살아가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가난 밖에 아무것도 없다. 신은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마저도 도와주지 않는다. 신을 위한 딸의 성찬식 때 입을 드레스마저 주지 않는 것이 바로 신이라는 사실을 캔감독은 보여준다. 그는 최근 영화인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도 신의 역할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는 태디는 본래 신학교를 졸업한 지식인이다. 하지만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려면 신학이 아니라 무장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성직자의 길을 포기한 채 민병대를 조직한다.


‘레이닝 스톤’에서 밥이 하수구를 청소하고자 할 때 동네의 부자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살고 있는 사람들도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을 보여주면서 빈부의 격차라는 사회현실을 호소한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어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도 독립군들의 무장투쟁한 결과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자치를 승인받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지 못한다. 독립군의 대장 테디의 동생 데이미언은 군에 들어오기 전에 일류병원에 취직되었다는 통보를 받은 전도유망한 의사이다. 이 때문에 이웃사람이 아들의 병을 치료해줄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그 병은 극심한 영양실조였다. 그들이 영국군으로부터 학대당하고 죽기 때문에 독립하려고 무장투쟁하여 결국 자치를 얻었지만 그것이 가난한 민중을 살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캔감독은 보여준다. 오히려 형 테디는 아일랜도 자치정부의 군인이 되고, 동생 데이미언은 민중을 위하여 봉기하자는 사회주의 민병대에 그대로 남는다. 아일랜드 자치정부군의 행위는 영국군 보다 더 폭력적이라며 민중의 비난을 받는다. 결국 동생은 다시 봉기하려다가 형에게 잡혀 사형 당한다.


캔감독은 이 영화에서도 아일랜드 국민 모두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하여 그것을 성취했더라도 민중이 구제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민중을 위하여 다시 투쟁할 수밖에 없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캔 로치를 사회주의적인 리얼리즘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게 깐느는 2006년 황금종려상을 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