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이름은 출생신고 할 때부터 나타난다. 출생신고는 사실상 당사자의 출생신고라기 보다 이름의 출생이자 탄생이다. 그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가며 그것에 대하여 아무런 생각없이 지낸다. 그러나 그 사람의 실체는 이름이 아니라 생김새이며 그 보다 그 마음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실체를 은근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최윤의 소설 ‘하나코는 없다’이다.
하나코는 언뜻 들었을 때 왜색의 이름인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니라 코가 돋보이는 여자의 별명이다. 하나코란 그 여자의 생김새를 대표적으로 나타내주는 것이다. 하나코는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 그의 친구와 함께 가끔 만나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는 그러한 관계이다. 이익이 걸린 만남도 아니고 늘 생활 속에서 만나는 것도 아니라 가끔 생각날 때 한번씩 만나는 그러한 관계이다. 이 소설에서 하나코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이름을 부를만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사적인 것보다 공적인 일에서 많이 일어난다. 그들은 그러한 관계가 아니므로 이름을 부를 일이 거의 없는 것이다. 그녀의 생김새가 이름이나 마찬가지이므로 하나코라고 부른다.
사람의 이름이 실체가 될 수 없고 반면에 외모는 그것이 될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외모가 완전한 실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에 따라 외모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시간과 공간은 물론 같은 시공간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변할 가능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완전한 실체가 될 수 있는가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마음도 외모와 마찬가지로 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의 실체가 과연 있는지가 의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한다. 인간 뿐만 아니라 만유의 실체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유가 각각 그만의 개별성, 독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인간의 실체는 여전히 외모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마음에 두고 있다. 즉 몸과 마음에 그 실체를 두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관계 속에서 한 여자의 실체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과 함께하는 그녀가 있는 듯 없는 듯하고, 그들은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은 듯하면서도 만나고 싶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경우는 흔히 일상생활에서 겪는 일들이다. 다만 그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그러한 일상을 섬세하게 관찰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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