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먹었는데 여유가 생기면서 먹는 것을 즐겼다. 이와 마찬가지로 종족번식의 본능으로 인하여 섹스를
했으나 여유가 생기면서 섹스를 즐기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오경중의 하나인 『예기』에서도 인간의 욕구에 대하여 '음식남녀'라고 했는데 이것은
인간의 욕구중에서 먹는 것과 섹스를 가장 본능적인 욕구라고 표현한 것이다.
인간의 본능인 이러한 섹스에 대하여 조선시대에는 관청에서 기생을 관리하는 것으로 주로 벼슬아치들이 섹스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기생들이 있었다. 따라서 공창제도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관기를 지속할 것인지 아니면 폐지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당국자에게 여론조사를 하라고 명했다. 당국자는 여론조사를 하는 와중에서 당시 정승이었던 허조를 빼놓고 하였다. 왜냐하면 허조는 청렴결백하여 여자를 멀리했기 때문이었다. 허조는 당국자를 불러 왜 자신에게 의견을 묻지 않느냐고 따지면서 관기제도를 지속할 것을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관기가 없으면 벼슬아치들이 권력을 이용하여 여자의 성을 착취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로인하여 조선시대는 줄곧 공창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기생들도 등급이 있어서 일패기생은 궁중출입을 하면서 벼슬아치를 상대했고 이들은 가무, 시문에 종사하면서 일류기생으로서 매춘을 하지 않았다. 이패기생은 사대부를 상대로 하면서 매춘을 하지 않는 것이 본분이었으나 은근히 매춘한다고 해서 '은둔군자'라고 불렀다. 삼패기생은 평민들을 상대했으며 주로 방중술을 익혀 전문 매춘업자였고 광대였던 여사당패는 천민까지도 상대했다. 또한 기생을 교육시키는 권번이 있어서 오늘날 예술대학을 방불케하는 이론, 실기교육까지 철저하게 시켜 그곳에서 일패, 이패, 삼패로 분류하여 배출하였다.
한일합방후 공창제도는 법적으로 없어져 매춘을 불법으로 규정했지만 기생들은 여전히 있었다. 태평양전쟁 때 일제는 기생들 보다는 주로 평민중에서 처녀들을 골라 종군위안부를 조직하여 군인들에게 성을 바치게 하였다.
전쟁 후 이들은 미군을 따라 귀국했고 수치심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미군들을 상대로 매춘을 하면서 기지촌이 생기게 되었다. 사실상 오늘날의 사창가는 미군주변의 기지촌이 원조인 셈이다. 또 일반인 상대로 확산되면서 오늘날의 청량리588, 미아리텍사스 등의 사창가가 전국적으로 자연스럽게 생겼다.
이러한 매춘에 대하여 현행법은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윤락행위방지법이라는 개별법까지 있다. 하지만 전국 곳곳에 버젓이 매춘가에서 매춘업이 성업중이며 여관, 룸싸롱, 안마시술소, 퇴폐이발소 등에서도 매춘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정부에서는 불법이기 때문에 단속하기도 하고 방치하기도 하면서 일관성이 없는 정책을 펴고 있으며 매춘 역시 음성적으로 운영되어 얼마전에 화재사고가 난 군산 사창가의 노예매춘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원인은 매춘을 불법화하면서 제대로 단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현행법대로 매춘을 철저히 단속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매춘을 합법화하든지 양단간에 결정을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의 섹스욕구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하기 때문에 구태여 매춘을 불법으로 규정해야하는 것도 좀더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인간의 본능인 이러한 섹스에 대하여 조선시대에는 관청에서 기생을 관리하는 것으로 주로 벼슬아치들이 섹스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기생들이 있었다. 따라서 공창제도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관기를 지속할 것인지 아니면 폐지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당국자에게 여론조사를 하라고 명했다. 당국자는 여론조사를 하는 와중에서 당시 정승이었던 허조를 빼놓고 하였다. 왜냐하면 허조는 청렴결백하여 여자를 멀리했기 때문이었다. 허조는 당국자를 불러 왜 자신에게 의견을 묻지 않느냐고 따지면서 관기제도를 지속할 것을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관기가 없으면 벼슬아치들이 권력을 이용하여 여자의 성을 착취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로인하여 조선시대는 줄곧 공창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기생들도 등급이 있어서 일패기생은 궁중출입을 하면서 벼슬아치를 상대했고 이들은 가무, 시문에 종사하면서 일류기생으로서 매춘을 하지 않았다. 이패기생은 사대부를 상대로 하면서 매춘을 하지 않는 것이 본분이었으나 은근히 매춘한다고 해서 '은둔군자'라고 불렀다. 삼패기생은 평민들을 상대했으며 주로 방중술을 익혀 전문 매춘업자였고 광대였던 여사당패는 천민까지도 상대했다. 또한 기생을 교육시키는 권번이 있어서 오늘날 예술대학을 방불케하는 이론, 실기교육까지 철저하게 시켜 그곳에서 일패, 이패, 삼패로 분류하여 배출하였다.
한일합방후 공창제도는 법적으로 없어져 매춘을 불법으로 규정했지만 기생들은 여전히 있었다. 태평양전쟁 때 일제는 기생들 보다는 주로 평민중에서 처녀들을 골라 종군위안부를 조직하여 군인들에게 성을 바치게 하였다.
전쟁 후 이들은 미군을 따라 귀국했고 수치심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미군들을 상대로 매춘을 하면서 기지촌이 생기게 되었다. 사실상 오늘날의 사창가는 미군주변의 기지촌이 원조인 셈이다. 또 일반인 상대로 확산되면서 오늘날의 청량리588, 미아리텍사스 등의 사창가가 전국적으로 자연스럽게 생겼다.
이러한 매춘에 대하여 현행법은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윤락행위방지법이라는 개별법까지 있다. 하지만 전국 곳곳에 버젓이 매춘가에서 매춘업이 성업중이며 여관, 룸싸롱, 안마시술소, 퇴폐이발소 등에서도 매춘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정부에서는 불법이기 때문에 단속하기도 하고 방치하기도 하면서 일관성이 없는 정책을 펴고 있으며 매춘 역시 음성적으로 운영되어 얼마전에 화재사고가 난 군산 사창가의 노예매춘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원인은 매춘을 불법화하면서 제대로 단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현행법대로 매춘을 철저히 단속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매춘을 합법화하든지 양단간에 결정을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의 섹스욕구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하기 때문에 구태여 매춘을 불법으로 규정해야하는 것도 좀더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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