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드보이’ 소개
이 영화는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으로 유명한 박찬욱 감독의 작품이다. 특히 2004년 칸느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여 더욱더 유명한 영화이다.
97년 일본 후타바샤 출판사에서 발간된 일본만화를 원작으로 하였다. 영문도 모른 채 무려 15년간 사설 감옥에 갇혀 있다가 나온 남자와 그를 가둔 남자 사이의 대결, 그리고 이런 비밀에 대한 반전을 다룬 미스터리 액션 드라마이다. 배우 최민식의 광기어린 연기가 무척 인상적이다. 이 영화는 말로 인하여 생겨난 증오, 복수심 그리고 남녀의 사랑이 윤리로서 용납되지 않음으로 인하여 비극이 일어나는 과정을 깊이 있게 다루었다. 원작 만화는 폭력배가 운영하는 사설 감옥에 감금된 고토가 초등학교 동창인 부동산 재벌 가키누마의 계략을 10년 만에 알아내고 서서히 그에게 다가간다고 설정되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러한 기본 설정만 빌려왔을 뿐 전체 스토리는 각색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사건의 모든 전모는 밝혀지는 종결부는 원작보다 더 충격적으로 나타난다.
이 영화에서 아쉬운 것은 한국의 현실과 좀 맞지 않은 점이다. 남매의 사랑을 지나치게 선정적으로 표현한 것은 일본사회에 어울릴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한국사회와 조금 맞지 않는 면이 있다. 그러나 父女 이전의 남녀 간의 사랑을 표현한 것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설정이다. 즉 실제 父女관계이지만 그러한 관계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벌어지는 男女간의 사랑을 사실적으로 잘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설정은 독창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미 청순한 이미지의 줄리 델피가 주연한 ‘사랑과 슬픔의 여로’에서 그러한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2. 말로 인한 증오
오대수는 고교시절 이우진 남매의 애정장면을 몰래 훔쳐보고 난 후 친구에게 말함으로 인하여 소문이 난다. 이 소문으로 이우진의 누나는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이 때문에 이우진은 복수심에 불타 오대수를 15년간 가둔다. 오대수 역시 사설감방에서 자신을 가둔 사람에 대하여 복수할 것을 다짐한다. 이처럼 이 영화는 말로 인하여 증오와 복수가 일어난다.
말이란 인간의 행위의 일종으로서 선하게 작용할 수도 있고 악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물론 이 영화에서는 善한 것이 아니라 악하게 작용했다. 선한 행위, 악한 행위는 마음의 선악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악한 말은 악한 마음으로 인하여 나오는 것이다. 이우진 남매의 성행위을 몰래 본 오대수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서 이우진의 증오는 시작된다.
증오 미움이란 선과 악이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움이란 선하게 나타날 수 있고 악하게 나타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이우진과 오대수의 증오심은 악하게 나타났다. 이우진의 오대수에 대한 증오는 결국 오대수를 15년간 감방에 가두게 하였다. 이 때문에 양자 모두 파멸에 길에 이르게 했다. 즉 이우진은 자살, 오대수는 자신의 혀를 잘라 스스로 벙어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의 증오는 악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의 원인은 오대수의 말이다. 오대수의 말은 악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의 말이 악하게 작용한 것은 그의 마음의 악으로 인한 것이다. 물론 오대수는 이우진 남매의 성애장면을 보고 친구에게 의도적으로 악하게 말한 것은 아니다. 다만 결과적으로 악하게 작용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결과는 오대수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는 악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오대수는 이우진 남매의 성애장면을 보고 기뻐했을 것이고 친구에게 말할 때도 기쁨의 발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기쁨이 악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감정이 말이라는 행위로 나타나는데 선이 아니라 악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할 수 있다.
3.
사랑과 윤리의 갈등
이 영화에서 이우진과 그의 누나는 남매관계 이전에 서로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비극을 낳았다. 왜냐하면 남매는 사랑할 수 없다는 윤리의식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대수와 미도는 부녀관계라는 사실을 모른 채 사랑한다. 하지만 오대수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고 자신의 딸이 그 관계를 알고 충격을 받을까봐 전전긍긍한다. 결국 그들의 사랑은 윤리로 인하여 비극적인 결말을 낳게 되었다. 그렇다면 사랑과 윤리는 인간에게 어떠한 것인가?
사랑이란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이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반면에 윤리란 인간의 본성이라 말하기도 하고 인위적인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반면에 식욕, 수면욕, 성욕 등의 욕구를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하였다. 또는 인간의 본성을 눈, 코, 귀, 입, 피부 등이 대상을 인식하면서 생겨나는 욕구라고 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인간이란 이기적이고 이로 인하여 싸움, 전쟁이 일어난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할 수 있다.
욕구를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영화는 흥미를 끌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욕구이기 때문에 남매, 부녀관계일지라도 성행위는 당연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우진과 오대수는 서로를 미워할 일도 없고 복수할 것도 없다. 따라서 고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들의 성행위는 본성의 발로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을 윤리라고 생각한다면 흥미를 끌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본성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성을 욕구라고 생각한다면 인간은 동물의 본성이 다를 것이 없다. 동물도 먹기도 하고 성행위도 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윤리가 있고 없고의 차이이다. 본성이란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우진 남매와 오대수 부녀의 사랑도 자연스럽다. 다만 윤리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비극으로 치닫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므로 악하다고 한다해도 이우진 남매와 오대수 부녀의 사랑은 이해할 수 없는 행위이다. 이기적이라면 남매와 부녀의 사랑은 가능하기 어렵다. 이기적이라면 당연히 부유함을 가져다 주는 사랑이어야 한다. 외모가 아름다울지라도 순간의 쾌락이지 그것이 진정한 사랑으로 연결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사랑으로 연결되려면 당연히 부를 가져다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흥미가 없다.
실제로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 라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연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다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스러운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완전한 자연스러움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스러움 즉 인간의 본성이 욕구라고 한다면 동물적인 행위로 인하여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이 때문에 결국 인간의 행위는 윤리로 귀결 될 수밖에 없고 선으로 지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영화 역시 사랑 보다 윤리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그들의 결말을 비극으로 처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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