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소개
이 영화는 1992년 러시아의 비탈리 카네프스키가 감독한 작품이다. 당시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하였다. 러시아의 외면 속에서 카네프스키 감독이 프랑스의 투자를 받아 만든 작품이다. 원제는 ‘독립된 인생’이지만 국내에서 개봉할 때 ‘눈오는 날의 왈츠’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 소년 발레르카가 청년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성에 눈을 뜨고 사랑을 하게 되지만 비참하고 차가운 현실 속에 점차 익숙해져 가는 과정을 그렸다. 따라서 ‘눈오는 날의 왈츠’라는 다소 로멘틱한 제목과는 거리가 멀다.
이 영화는 카네프스키 감독의 처녀작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라는 영화의 속편이다. 감독의 자전적인 시나리오를 영화화한 것이다. 카네프스키는 25세에 모스크바 영화학교 연출과에 입학했으나 강간혐의로 감옥살이를 하였고 41세에 졸업한다. 이 영화에서 발레르카가 직업훈련원에서 불법성행위혐의를 받고 퇴학당하는 설정이 그러한 것이다. 영화의 무대인 스촨은 카네프스키 감독의 고향이다. 발레르카 배역을 맡은 나자로프는 직업배우가 아니라 실제 비행청소년이었다. 감독의 젊은 시절의 분신이라고 할만하다. 이 영화를 찍은 다음해 그는 빼쩨르부르크의 뒷골목에서 비행을 저질러 소년원에 수감되었다.
‘눈오는 날의 왈츠’는 1930년대 전쟁이 끝났지만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군들의 슬픈노래가 들리는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했다. 순수해야할 사랑이 냉혹한 현실로 인하여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전체적으로 시릴 정도로 하얀 눈밭과 칙칙한 화면이 냉혹한 현실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특히 시베리아의 차가운 바람, 무릎까지 빠지는 짓눈깨비, 검고 얼음이 뒤덮인 아무르강 등은 바레르카 앞에 펼쳐진 냉혹한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발레르카 엄마의 매춘, 낙태, 직업훈련원에서의 매춘과 강간 등 여러 가지 성문제와 노동판에서의 추잡한 사건, 말투 등이 거부감을 줄 수 있지만 당시 현실을 여과 없이 사실적으로 보여주면서 소년, 소녀의 사랑을 그린 점이 높이 평가할만하다. 카네프스키 역시 사실주의적인 감독이다.
2. 순수한 사랑과 비참한 현실
사랑이란 인간이 원초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사랑도 냉혹한 현실 앞에서 무디어질 수 있다. “내가 상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라는 물음 조차 생각할 여유도 없이 잊혀질 수 있을 것이다. 발레르카가 스촨을 떠나기 전 발카와 사랑을 했지만 그곳을 떠나 아무르강에서 살면서 사랑마저도 희미해진다. 발카의 편지를 받았지만 수개월 동안 답장을 하지 못한다. 그곳에서 발레르카는 조선소의 용접공으로 일하는데 그 곳 생활이 쉽지만은 않다. 불량배들에게 칼에 찔리고, 잘 알지도 못하는 아줌마 집에서 기거하면서 성노리개로 지낸다. 이처럼 각박한 생활 속에서 발레르카의 마음 속에 이미 발카는 점점 사라져 간다. 발카가 보낸 편지도 간직하는 것을 잊는다. 그녀를 사랑하지만 비참한 현실 속에서 그것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인간은 사물을 접하면서 욕심이 생긴다. 욕심 때문에 이기적인 존재가 된다. 고향 스촨에서 발레르카와 발카의 사랑은 순수했으나 그곳을 떠나 현실에서 시달리는 발레르카의 마음 속에 이미 사랑은 메말랐던 것이다. 최소한의 욕심도 채울 수 없는 현실로 인한 것이다. 당시 현실은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인 사랑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스탈린 동상 앞에서 쥐에 휘발유를 뿌려 쓸모 없는 것들은 죽여야 한다며 태우는 것은 체제를 은연 중에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발레르카가 너무 잔인하다며 불을 끄는 장면은 아직도 그에게 측은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랑이란 측은한 마음을 포함하고 있다. 즉 사랑의 선한 측면이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냉혹한 현실에서도 발레르카의 마음 저변에는 측은한 마음이 있으므로 사랑 할 수 있는 마음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도 제대로 발휘 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시 사회는 메말라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도 메마르게 할 정도의 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발카가 발레르카의 답장을 기다리다 지쳐 아무르강으로 찾아온다. 그러나 발레르카에게 고향에서의 발카와 사랑을 했던 것은 현실이 아닌 과거일 뿐이었다. 사귀는 남자가 있느냐고 묻고, 발카가 발레르카의 딸을 낳았다는 말을 해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스촨에서의 사랑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늘 있는 성행위에 불과하다는 사고가 이미 발레르카의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카의 마음 속에 오로지 발레르카의 순수한 사랑은 남아 있다. 하지만 그의 변한 모습을 보고 캄차카로 향한다. 그리고 물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발카의 자살에도 발레르카에게 무감각한 것이다. 물론 사랑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고 발카의 자살에 대하여 완전히 무감각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다.
비참한 현실에서 순수한 사랑은 어려운 것이고 인간의 또 다른 본능은 성행위만이 있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물론 비참한 현실에서 순수한 사랑은 있지 말란 법은 없다. 의식주도 해결 할 수 없는 전쟁 중에서도 순수한 사랑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물론 이 영화에서는 사랑도 각박한 스탈린 체제의 현실에서 메마르지만 그래도 사랑할 수 있는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각박한 현실에서 사랑하는 마음은 의식 저변에 깔려 있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여유도 없는 발레르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3. 생명의 소중함과 하찮음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생명은 그다지 소중하게 표현되지 않고 있다. 이 영화의 전편인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에서 발레르카는 발카의 언니 갈리아를 사랑했으나 정부군에게 별다른 죄도 없이 피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레르카는 그 사내가 지나가자 윙크를 하고 이 때문에 발카에게 욕설을 듣게 된다. 발레르카도 그에게 피살당할 뻔했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윙크를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생명도 하찮게 여기는 스탈린체제를 비판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런 죄책감도 없는 정부군에 비해 발레르카는 자신으로 인하여 갈리아가 죽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발카에게 고백한다. 어른의 눈에 시골 소녀의 목숨은 하찮은 것이지만 소년의 눈에 비친 소녀는 그 어떤 생명 보다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生과 死는 슬플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생은 기쁨이지만 사는 슬픔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사고로 죽는다는 것은 슬픔 그 이상이다. 갈리아의 죽음 뿐만 아니라 발레르카 엄마의 낙태수술, 이로 인한 중태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발레르카가 아끼던 돼지를 먹고 살기 위하여 도살하는 것도 그에게는 슬픔의 극치이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은 氣의 운동으로 인한 것이다. 기가 모이면 생명이 탄생되고 흩어지면 죽는다. 기가 스스로 운동하지만 운동할 수 있는 원인은 바로 理이다. 리는 기 가운데 있으므로 그러한 원인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리와 기의 작용으로 인간은 물론 다른 생물이 태어나고 죽는다. 인간에 있어서 리는 윤리이다. 기는 육체 속에서 氣質로서 나타난다.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인 사랑도 기가 발동하여 나타난다. 하지만 사랑에도 윤리는 있는 것이다. 물론 윤리적인 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윤리적인 惡도 있다. 사랑을 통하여 생명이 탄생되는 것은 당연히 축복받을 일이다. 그러나 생명이 탄생을 반드시 사랑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돈을 주고 받는 매춘은 사랑 없이도 충분히 생명이 나올 수 있다. 발레르카의 엄마와 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이러한 생명은 축복받을 수 없고 결국 세상을 보지 못한 채 어른에 의하여 사라진다. 이 모습에서 발레르카는 생명의 귀중함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생명이란 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낳은 발카를 보고 새 생명의 귀중함을 느끼지 못한다. 마치 엄마가 매춘으로 임신한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처럼 그러했다. 이러한 메말라있는 그의 마음은 차가운 시베리아 만큼 냉혹한 현실에서 겪은 고통으로 인하여 나온 것이다. 생명의 귀중함을 잃어버린 발레르카이지만 강물에 투신한 발카의 소리를 듣고서도 무감각하다. 물론 어떤 여인이 물에 뛰어들었다는 소리가 들린 것이지 발레르카가 자살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나중에 쥐에 휘발유를 뿌려 태워 죽일 때 너무 잔인하다며 불을 끄려한다. 그 후 발레르카는 물에 뛰어들고 다시 뭍으로 기어 나오면서 영화는 끝난다. 결국 발레르카가 살아 나오는지 그렇지 않으면 물에 빠져 죽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가 발카의 언니 갈리아를 죽게하고 결국 발레르카도 자살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으로 물에 뛰어든 것으로 보인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생명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무의식에 있었으며 발카의 사랑을 모른 채 했을지라도 사랑의 감정이 의식 밑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을 드러내지 못한 채 비극으로 끝이 난 것이다. 그 원인은 차가운 현실이었고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스탈린 체제로 인한 것이라고 카네프스키 감독은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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