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선천적으로 평등한 존재이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후천적으로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 공동체생활을 하게 된다. 부유층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그
순간부터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지만 빈곤층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기나긴 빈곤의 고리를 풀기가 어렵기 때문에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것이
오늘날 국제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부자나라에서 태어나면 그래도 최소한 먹고 살 수 있는 것은 보장되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면 그것마저도
보장받기 어렵다. 이 때문에 가난한 나라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하여 그래도 살만한 나라에 가서 취업을 하곤 한다. 60,7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서독, 일본에 가서 합법적인 취업 또는 불법으로 취업을 했던 것이 그 예이다. 이 때 수많은 사람들이 단지 가난하고 유색인종인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에게 무시당하고 구타를 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들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이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단지
가난한 나라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인권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현재 우리나라는 GDP 12위, 세계 1백대 기업 중에서 우리의 기업이 7개가 들어가 있어서 이것만 따진다면 세계6위라고 한다. 그만큼 산업이 발전되어 있어서 개발도상국의 수준을 벗어나서 후발공업국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아시아의 저개발국 사람들이 산업연수생, 관광비자 등으로 입국하여 체류기간이 지나면 돌아가지 않고 불법으로 취업을 하고 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조선족, 구소련의 고려인들 까지도 국내에 들어와서 내국인들이 기피하는 3D업종에서 일하며 내국경제에 기여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코리안드림을 꿈꾸고 입국한 아시안이라고 하여 코시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고 구타하는 등 인권침해가 무척이나 심하다고 한다. 심지어 연예인 비자로 들어온 여성들에게 매춘을 강요하고 좁은 방에 가두고 월급을 떼어 먹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을 법은 물론 그 어떤 방법으로든 보호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 큰 문제이다. 만약 이들이 혐오를 느끼고 모두 귀국한다면 우리의 3D산업은 폐기처분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국가이미지가 나빠져 그들의 나라와 외교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구미각국의 백인들에게는 마치 존경이라도 하는 듯이 떠받들고 있다. 그들 역시 취업비자가 아닌 유학비자로 들어와 대학에 이름만 걸어 놓고 학원가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면서 세금 한푼 내지 않고 수입을 올리고 있다. 특히 미국학생들은 방학 때만 되면 국내 학원에서 돈을 벌어 본국으로 돌아가 학비조달을 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영어를 배우는 한국인들은 마치 군사부일체의 스승처럼 떠받들고 있다. 한마디로 내 돈 주고 존경하는 등 수지타산에 안맞는 일만 되풀이 하고 있다. 또한 기지촌의 한국인 매춘부들의 소원은 미국인 병사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민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국내에서 동거하다가 구타당하거나 힘들게 번 돈을 떼이는 등 온갖 피해를 다주고 있는데도 또 다른 미군을 찾는다. 결혼하여 미국에 살다가 남편의 심한 구타로 이혼 한 후 현지에서 다시 매춘 내지는 유흥업에 종사 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국내에 들어와 기지촌 생활을 한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고 미국에 들어간 한국인들을 코메리칸이라고 부른다.
국내 산업에 별 도움도 주지 않는 영어권 백인들에게 대접을 잘해주고 우리가 하기 싫어하는 업종에서 묵묵히 일하며 국내산업에 기여하는 코시안들에게는 그토록 학대하는 것이 이 사회의 모순이다. 우리는 부자나라 사람들을 높이고 가난한 나라사람들을 짐승같이 여기는 천민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면서 무의식중에 당연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옛날 우리는 현재와 같은 폐쇄적인 행동만을 하지는 않았다. 그 한 예로서 고려시대에는 지금보다 훨씬 개방적이었다.
고려 때에는 해외통상이 많았기 때문에 많은 외국인들이 왕래하였다. 그들이 주로 배를 이용하다가 바람이 제 때 불어주지 않아서 국내에 장기체류하면서 눌러 앉아 귀화를 해서 수대를 이어가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후손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당시에는 중국인 뿐만 아니라 몽골인, 서역인, 아랍인들도 개성에 살면서 그들의 종교를 신봉하고 심지어 이슬람사원을 지어 그곳에서 종교생활도 하고 그들의 복장을 그대로 고수하며 살았다. 그들은 출신국가를 막론하고 다들 자유롭게 살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해외통상이 줄어들어 외국인의 왕래가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우리가 그토록 떠받들고 있으며 1만원짜리 지폐 속에서 명예를 유지하고 있는 세종은 그들의 자유를 금지하여 모두 조선인과 같이 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그들의 풍속이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에는 주로 명나라와의 조공무역, 일본과의 왜관무역 등이 있었고 이것마저도 고려와 같이 그다지 활성화 되질 못했다. 이 때문에 조선의 문화는 다양성을 잃어버렸고 오랫동안 수구적인 자세를 유지하다가 후기에는 화이론이 등장하여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주었다는 명분으로 이미 사라진 명나라를 존경하고 당시 부강한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하여 무시하며 적극적인 통상을 하지 않는 등 변동하는 국제사회에 적응하지 못하였다. 훗날 청나라 보다 더욱더 강한 서구열강과 일본의 침략을 받았고 결국 일제에 의한 강점기를 맞게 되었다.
현재 우리는 조선인의 피를 이어받아서 인지 국내산업에 기여하는 코시안들을 학대하고 있다. 코메리칸들은 미국에서 학대받고 코시안들은 국내에서 인권침해를 당하는 등 이보다 더 잘된 상호주의는 찾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오늘날과 같은 천민자본주의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대의명분에 입각한 행동이었다. 이왕지사 조상의 피를 이어받았다면 조선의 대의명분을 생각하는 것이 보다 현명하고 이보다는 고려의 개방적인 자세를 계승하여 코시안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더욱더 현명할 것이다. 이를 통하여 사람은 선천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이 현실 속에서 보여준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현재 우리나라는 GDP 12위, 세계 1백대 기업 중에서 우리의 기업이 7개가 들어가 있어서 이것만 따진다면 세계6위라고 한다. 그만큼 산업이 발전되어 있어서 개발도상국의 수준을 벗어나서 후발공업국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아시아의 저개발국 사람들이 산업연수생, 관광비자 등으로 입국하여 체류기간이 지나면 돌아가지 않고 불법으로 취업을 하고 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조선족, 구소련의 고려인들 까지도 국내에 들어와서 내국인들이 기피하는 3D업종에서 일하며 내국경제에 기여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코리안드림을 꿈꾸고 입국한 아시안이라고 하여 코시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고 구타하는 등 인권침해가 무척이나 심하다고 한다. 심지어 연예인 비자로 들어온 여성들에게 매춘을 강요하고 좁은 방에 가두고 월급을 떼어 먹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을 법은 물론 그 어떤 방법으로든 보호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 큰 문제이다. 만약 이들이 혐오를 느끼고 모두 귀국한다면 우리의 3D산업은 폐기처분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국가이미지가 나빠져 그들의 나라와 외교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구미각국의 백인들에게는 마치 존경이라도 하는 듯이 떠받들고 있다. 그들 역시 취업비자가 아닌 유학비자로 들어와 대학에 이름만 걸어 놓고 학원가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면서 세금 한푼 내지 않고 수입을 올리고 있다. 특히 미국학생들은 방학 때만 되면 국내 학원에서 돈을 벌어 본국으로 돌아가 학비조달을 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영어를 배우는 한국인들은 마치 군사부일체의 스승처럼 떠받들고 있다. 한마디로 내 돈 주고 존경하는 등 수지타산에 안맞는 일만 되풀이 하고 있다. 또한 기지촌의 한국인 매춘부들의 소원은 미국인 병사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민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국내에서 동거하다가 구타당하거나 힘들게 번 돈을 떼이는 등 온갖 피해를 다주고 있는데도 또 다른 미군을 찾는다. 결혼하여 미국에 살다가 남편의 심한 구타로 이혼 한 후 현지에서 다시 매춘 내지는 유흥업에 종사 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국내에 들어와 기지촌 생활을 한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고 미국에 들어간 한국인들을 코메리칸이라고 부른다.
국내 산업에 별 도움도 주지 않는 영어권 백인들에게 대접을 잘해주고 우리가 하기 싫어하는 업종에서 묵묵히 일하며 국내산업에 기여하는 코시안들에게는 그토록 학대하는 것이 이 사회의 모순이다. 우리는 부자나라 사람들을 높이고 가난한 나라사람들을 짐승같이 여기는 천민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면서 무의식중에 당연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옛날 우리는 현재와 같은 폐쇄적인 행동만을 하지는 않았다. 그 한 예로서 고려시대에는 지금보다 훨씬 개방적이었다.
고려 때에는 해외통상이 많았기 때문에 많은 외국인들이 왕래하였다. 그들이 주로 배를 이용하다가 바람이 제 때 불어주지 않아서 국내에 장기체류하면서 눌러 앉아 귀화를 해서 수대를 이어가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후손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당시에는 중국인 뿐만 아니라 몽골인, 서역인, 아랍인들도 개성에 살면서 그들의 종교를 신봉하고 심지어 이슬람사원을 지어 그곳에서 종교생활도 하고 그들의 복장을 그대로 고수하며 살았다. 그들은 출신국가를 막론하고 다들 자유롭게 살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해외통상이 줄어들어 외국인의 왕래가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우리가 그토록 떠받들고 있으며 1만원짜리 지폐 속에서 명예를 유지하고 있는 세종은 그들의 자유를 금지하여 모두 조선인과 같이 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그들의 풍속이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에는 주로 명나라와의 조공무역, 일본과의 왜관무역 등이 있었고 이것마저도 고려와 같이 그다지 활성화 되질 못했다. 이 때문에 조선의 문화는 다양성을 잃어버렸고 오랫동안 수구적인 자세를 유지하다가 후기에는 화이론이 등장하여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주었다는 명분으로 이미 사라진 명나라를 존경하고 당시 부강한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하여 무시하며 적극적인 통상을 하지 않는 등 변동하는 국제사회에 적응하지 못하였다. 훗날 청나라 보다 더욱더 강한 서구열강과 일본의 침략을 받았고 결국 일제에 의한 강점기를 맞게 되었다.
현재 우리는 조선인의 피를 이어받아서 인지 국내산업에 기여하는 코시안들을 학대하고 있다. 코메리칸들은 미국에서 학대받고 코시안들은 국내에서 인권침해를 당하는 등 이보다 더 잘된 상호주의는 찾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오늘날과 같은 천민자본주의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대의명분에 입각한 행동이었다. 이왕지사 조상의 피를 이어받았다면 조선의 대의명분을 생각하는 것이 보다 현명하고 이보다는 고려의 개방적인 자세를 계승하여 코시안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더욱더 현명할 것이다. 이를 통하여 사람은 선천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이 현실 속에서 보여준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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